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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가, 차(茶)생활 일기 : 기다림 끝에 만난 첫 제다 실습 "이한영차문화원"

by 페이지플릭스 2025. 5. 25.

기다림 끝에 만난 첫 제다 실습, 외로움과 떨림 사이에서

이한영 차문화원 2기 제다 실습과정

그 오랜 기다림 끝에, 마침내 그날이 찾아왔다.

 

사실, 설렘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이론 수업 때 옆자리를 지켜주던 너는 연이어진 실습 스케줄이 맞지 않아 함께하지 못했고,
나 혼자 남아야 한다는 게, 어쩐지 너무 외롭고 쓸쓸했다.

'정말 가지 말까?'

새벽이 올 때까지 몇 번이고 고민했다.
하지만 마음 한편, 포기하고 싶지 않은 작은 용기가 나를 새벽 6시에 일으켜 세웠다.

덜 깬 눈으로 차가운 공기를 헤치며, 7시까지 차문화원에 도착했다.

 

함께 모인 사람들은,
제주에서 차 프로그램을 이끄는 여월즈 팀,
거창에서 차밭을 일구고 찻잎을 덖는 부부 어르신,
강진에서 막걸리 조주장을 운영하는 분,
광주에서 다식을 빚는 데 이름난 분들이었다.
서로의 사연과 온기가 느껴지는 작은 인연들이었다.

 

야생차를 따기 위해 향한 대나무숲은 누군가 손질한 길 같은 건 없었다.
우리는 몸을 웅크리고, 가지를 밀어내며 대나무의 벽을 조심스레 헤치고 들어갔다.

 

곡우가 지난 4월 25일.
이맘때면 찻잎이 무성해야 할 시간인데, 올해는 유난히 추운 봄 덕분에 초록 숨결들이 아직 숨어 있었다.

 

"일아일엽을 따야 합니다."
선생님의 말이 공기처럼 퍼졌다.
손톱으로 짓누르지 않고,
똑— 가볍게 떼어내는 느낌으로.
세상을 다 알 것 같은 성긴 잎은 피하고, 막 피어날 준비를 하는 어린잎들도
자연의 흐름에 맡기기로 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야생 차나무를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보성에서 녹차 체험을 해봤던 잘 딸 수 있겠다 싶었지만,
찻잎을 바라보고 있으면 이게 일아일엽 맞나 싶은 의문뿐이었다.

 

사방이 초록으로 물든 숲에서, 나는 찻잎을 제대로 찾지 못하고

그저 대나무숲을 헤치다 나온 사람이었다.

 

그렇게 3시간.
여덟 명이 정성껏 모은 찻잎은 고작 700g 남짓이었다.

 

숫자로는 작아 보여도,
그 안에는 떨리는 손길과 부끄러운 초심,
자연을 대하는 경외심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외롭고 쓸쓸했던 시작이었지만,
그 시간 덕분에 차나무와 조금 더 가까워진 시작이었다.

 

찻잎이 적어 백차를 만들어 보기로 결정했다.

 

덖거나 비비거나, 쪄내지 않고 오롯이 시간에 맡겨 만드는 차.
그게 백차다.

마치 햇살과 바람이 차를 덖는다는 말처럼,
백차는 손보다 자연이 더 많은 일을 하는 차였다.


아침 일찍 채엽한 찻잎은 습한 공기를 머금은 채 조심스레 펼쳐졌다.
조용히 놓인 잎들은,
마치 막 피어나 여리지만, 속엔 생명의 기운이 가득했다.

 

“덖지 않고 기다린다”는 말이 처음엔 낯설고 조바심을 안겼다.
시간을 믿는 일은 언제나 어렵다.

 

하지만 찻잎은
햇살과 바람을 맞으며 서서히 숨을 골랐다.

 

생각보다 추운 날씨와 얄궂은 바람덕에, 찻잎을 사랑채로 옮겨 펼쳐주었다.


수분은 떠나고 향은 피어나고,
잔잔한 산화 속에서
차는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백차로 태어나길 기다린다.

 

백차는,
사람 손은 물러서고
대신 햇살과 바람이 일하는 시간 속에서
말없이 차가 되는 시간을 기다리는 것이다.

 

 

백차 만드는 과정

 

🌱 1. 채엽(採葉)
백차의 시작은 아주 부드러운 새싹을 만나는 일이다.
손끝에 살포시 올리면 금세 바람에 날아갈 듯 여린 잎.
3월에서 4월, 곡우 전후.
겨울잠에서 막 깨어난 차나무는 은빛 솜털을 품은 새싹들을 세상 밖으로 올려 보낸다.

우리는 그중에서도 가장 어리고 순한 것을 골라낸다.
하나는 백호은침, 단 하나의 싹(일아)만을 따는 고요한 집중.
또 하나는 백모단, 한 잎과 싹이 함께 피어난 형태(일아일엽, 일아이엽)
좀 더 익은 성숙한 잎까지 아우르는 수미까지도 백차가 된다.

하지만 이 찰나의 선택도 시간과 싸움이다.
잎을 따는 순간부터 산화가 시작되기에 망설이면 향은 날아가고,
우리는 차가 아닌 '그냥 마른 잎'을 얻게 된다.


🍃 2. 위조(萎凋)
백차의 영혼은 바로 이 두 글자, 위조에 담긴다.
덖지 않고 비비지 않으니, 향과 맛은 바람과 햇살이 엮어낸 서사로 완성된다.

차는 낮은 평상 위에 펼쳐진다.
통풍이 잘 되는 그늘 혹은 은은한 햇볕 아래
24시간- 72시간, 긴 시간 동안 조용히 마른다.
바람이 너무 세도 안 되고, 공기가 너무 습해도 안 된다.
모든 것은 느리게, 그러나 정확하게.

 

이 과정에서 백차는
단순히 말라가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산화되고 숙성된다.
바로 이때 형성되는 향미가 백차를 백차답게 만든다.
부드럽고 은은한,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 풍미.


🔥 3. 건조(乾燥)
마지막으로는, 남은 수분을 조심스레 날린다.
햇볕에 말리거나 아주 약한 불에 천천히 구워내듯 건조한다.
너무 뜨거우면 향은 날아가고, 백호는 사라진다.
바삭하되 부서지지 않아야 하고,
완전히 말라야 오래도록 곁에 둘 수 있다.

백차는 말 그대로 기술보다 태도가 만든다.
무언가를 '하지 않음'의 미학.
손을 덜 대고, 말을 아끼며, 자연이 차가 되는 과정을 방해하지 않는 것. 

 

 백차의 특징

  • 발효도: 약산화 (~10% 이내, 비발효에 가까움)
  • 향미: 은은하고 꽃향 같은 부드러운 향
  • 맛: 달고 맑으며 떫지 않음
  • 색: 찻물이 연하고 맑은 황색 또는 은빛
  • 백차는 시간이 지날수록 깊어지는 숙성형 차이기도 하다.

보관이 잘되면 10년 후에도 즐길 수 있는 ‘시간이 만든 차’이기도 하다.